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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최종장과 변방_비디오 게임 속 공간적 한계의 실감

13

GG Vol. 

23. 8. 10.

1.

게임 세계의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것은 어린이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무료 플래시 게임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디오 게임의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의 나는 커비와 똑 닮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플래시 게임에 빠져 있었다. 정식 게임판의 커비보다 이 안광 없는 가짜 “커비”와 먼저 면을 익혔다. 그때의 기준으로도 비춰봐도 결코 흥미진진한 게임은 아니었다. 이 “커비”도 정식 게임판의 커비처럼 적을 빨아들이거나 뱉으면서 납작한 2차원 세계를 전진해나갔다. 숨을 참으면 둥둥 뜰 줄도 알았다. 다만 이 “커비” 게임의 어떠한 장애물도 시간을 바쳐 극복할 가치가 없었다. 몬스터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의무라도 지키듯이 듬성듬성 떨어져 돌아다니며 내외했다. 모아봐야 아무런 효능이 없는 별들이 잘도 모였다. 탈출해야 하는 구덩이는 얕았고, 점프해 올라타야 하는 발판은 낮았다. 분량은 짧았다. 조물주는 이 세계를 완성하지 않고서 소피를 보러 떠난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나버리고서, 무언가를 미완으로 남겨두고 떠나왔다는 사실조차 영영 잊어버린 것이다.


십분 이상 잡고 있을 가치가 없는 조잡하고 공허한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혹되었다. "커비"는 무성의하게 마지막 발판에 도착해 승리의 깃발을 올린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발판이 사라지고 발판 없는 바다가 이어졌다. "커비"는 이 바다 위로 날아갈 수 있었다. 키만 주의해서 누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날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콜럼버스라고 상상하는 어린이 제국주의자는 이 바다에 매혹되었다. 언젠가 그 넓디넓은 바다를 횡단하고, 인내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히든 스테이지를 발견하리라 믿었다. 그렇게 수 시간 동안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키를 눌렀다. 숨을 참으며 둥둥 떠다니는 커비를 지켜보았다. 영원에 육박하는 시간이 더 지났다. 영원은 그 채도 높은 평면의 바다, 수면에 닿으면 바로 숨이 넘어가는 지옥의 바다, 파도 한 번 치지 않는 적막의 바다가 무한히 반복되는 병풍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해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분통을 터뜨렸고, 사기극에 휘말렸다고 믿었으며, 땅이 꺼지는 허무로 괴로워했다.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의 실존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고 또 자문하고, 시대의 진리가 될 답변을 거의 얻을 뻔했다...



2.

게임 세계의 종점, 그것은 사실 신대륙일 필요도 없었다. 최소한 세계 끝자락의 상어라도, 상어의 지느러미라도, 이마를 찧어야 하는 벽이라도 발견하면 족했다. 더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전진의 여지는 필연적인 근거를 갖고 생성된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제는 추억이 된 커비 플래시 게임을 제작한 익명의 인물은 진행을 가로막는 벽이나 끝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아바타의 공간적 이동의 여지를 마련한 게임에 있어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출발선에서 시작해 결승선에 달하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제작자의 의도와 게임 장르의 오락적 규약의 다발들 사이의 교류를 통해서 그려지는 필연적 배치에 의한 것이다.


플레이어는 이 필연적 배치 안에서 자신이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조우를 강제당하기를 원한다. 정확히는 예상한 범위 내에서 예상치 못한 조우를 강제당하기를 원한다. 스테이지로 나뉜 플랫포머 게임에서, 그 최후의 대단원이 되어 줄 조우는 마지막 스테이지에 일어날 것으로 흔히 기대된다. 측면의 얼굴만 보여주는 수줍음 많은 플레이어의 아바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한다. 하나의 스테이지는 다른 스테이지로 향하기 위해 돌파해야 하는 이차원적 통로면서, 그 돌파를 방해하는 물리적 저항이기도 하다. 공중에 떠 있는 발판은 점프를 지시한다. 밧줄은 위로 올라가기를 지시한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발판은 타이밍에 맞는 점프를 지시한다. 구덩이 속 뾰족뾰족한 가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점프를 지시한다. 스테이지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플레이어가 아바타를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도록 지시하는 추상들의 구문이기도 하다. 게임의 공간적 끝, 게임의 마지막 행위, 게임의 마지막 무대(stage)를 보고자 하는 소망은 그러므로 중첩되고, 혼재되며,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다.


플랫포머 게임에서 최후의 공간, 최후의 조우에 대한 소망은 더불어 충족된다. 가령 <슈퍼 마리오Super Mario> 시리즈는 쿠파와 같은 강대한 보스와 대결하고 납치된 피치 공주를 구조하는 스테이지를 항상 대단원의 스테이지로 삼는 전통을 갖고 있다. 반면 <슈퍼 마리오> 의 안티테제이고자 하는 게임 <브레이드Braid>는 플레이어가 마지막 스테이지에 이르러서야 여태까지의 여정과 전진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도록 무대를 배치한다. 주인공이 공주를 구하고자 달려온 게 아니라, 그 주인공으로부터 달아나는 공주를 쫓고 있었다는 진실 말이다. 스테이지 게임 저변에 깔린, 명쾌하고 명료하며 직선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스테이지 간의 근원적인 단절을 숨기고, 좌우로 길게 봉합된 스테이지의 연쇄를 통과하며 전진하고 있단 환상을 유지한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의 변용인 게임 <돈룩백Don’t Look Back>은 공간적 연속성이란 환상을 선형의 이야기가 지탱하는 구조를 잘 보여준다. 말 없고 추상적인 픽셀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케르베로스와 하데스를 상대하고, 붉은 용암을 뛰어넘으며, 에우리디케의 혼을 만나 함께 무사히 지하 세계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주인공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대안적이고 희망적인 결말이 아니라, 묘지를 떠난 적조차 없는 자기 자신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스테이지 구조의 수미상관은 이 아바타가 전진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구원되지 않고 단지 썩어갈 뿐이란 사실로부터 달아나고 있었음을 표명한다. 묘지를 애초에 떠난 적조차 없다는 진실은 스테이지 게임의 불안정한 틈새를 벌려 보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며 플레이어는 이전 스테이지와 이후 스테이지를 지나친다. 그 통로의 연속성은 시간적 선후 관계와 공간적 연결을 혼동하는 결과물로서만 담보될 수 있다. 이 연속성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혹은 순식간에 믿음직스럽지 못해질 수 있는지를 전진과 회귀의 구조를 통해 <돈룩백>은 보여준다.


<돈룩백> 시작 화면

플랫 포머 게임들은 이처럼 이차원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전진에 대한 비평을 게임 내적인 논리에서 마련한다. 그 비평은 특히 게임이 제공하는 최후의 조우와 최후의 공간을 중첩하는 방식에 따라서 특유의 완결된 형식미를 갖춘다. 그러므로 가짜 커비 게임에서, 게임의 끝을 아직 마주하지 않았다는 감각이 마음을 부글부글 끓게 했고, 그 끝이 한참 전부터 반복 재생되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형식미가 부재하며 의미화되지 않는 전진과 그 전진의 최종 국면이란 게임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어 보였다.



3.

게임 세계의 종점으로 향하는 선로가 증식한다.


무료 플래시 게임을 섭렵한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더 좋은 사양의 콘솔 기기, 게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공간, 대형 제작사의 게임을 구매할 돈 등을 통해 얻은 접근성으로, 나는 소위 "오픈 월드Open-World" 게임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종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은 "오픈 월드" 게임의 진화로 인해 더욱 복잡다단하게 변화한다. “자유롭게 배회하는Free-Roaming” 게임이라고도 불리는 “오픈 월드”는 형식미가 부재하며 의미화되지 않는 무한한 전진을 장려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오픈 월드”는 게임의 3차원적인 종점에 해당하는 경계 지대를 필연적으로 탐색할 필요는 없도록 공간을 구조화한다.


우선, “오픈 월드"는 게임 디자인 차원에서 엄밀히 정의된 개념이기보다는 사용자들이 특정 게임 경험을 유형화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임을 밝혀야겠다. 게임 기술의 발전과 컴퓨터 사양에 크게 의존하는 ”오픈 월드“는 게임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어떤 오픈 월드는 거짓 오픈 월드고, 어떤 오픈 월드는 진정한 오픈 월드란 식의 판정을 벌이는 토론은 포럼에서 아주 흔히 보이고, 이는 오픈 월드가 게임을 분류하는 항목인 동시에 가치의 척도로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사용자들은 근 10년 이내에 발매된 동시대의 오픈 월드 게임을 말하며 함께 GTA, 젤다의 전설, 위쳐 3,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 폴아웃 3 이후의 폴아웃 시리즈 등을 떠올린다.


내러티브를 가진 ”오픈 월드“로서 잘 알려진 이 대형 게임들에 대한 대체적 진술로서 ”오픈 월드“를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사용자들은 이동 제약의 제거를 기대하고, 이동 제약의 제거를 실감할 수 있도록, 오픈 월드 게임은 제작 단계에서 복수의 진로, 단 하나의 선택지가 아닌 선택지의 다발을 염두에 두게 된다. 오픈 월드 게임은 더불어 영영 멀어지는 지평선이 있는 광대한 풍경으로 플레이어를 초대한다. 1인칭 카메라를 통해 플레이어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로 화하며, 3인칭 카메라의 경우, 지평선 앞에 자리한,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아바타의 뒷모습을 비춘다. 이 카메라는 360도로 돌아갈 수 있는 경우가 잦지만, 원근법상 현실적인 축적과 눈높이를 갖고서 게임 세계에 떨어진 플레이어의 아바타를 비춰야 한다. 플레이어는 지도를 켜거나 미니맵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실시간 위치를 식별한다. 또한, “오픈 월드”는 게임 스테이지(stage)에 의한 분단과 로딩을 최대한 제거하고자 한다. 그리고 변형의 가능성으로부터 닫혀 있는 방해물이었던 오브젝트(object)는 되도록 플레이어의 조작을 통해 이동 혹은 변형 가능한 원자재로서 나타나야 한다. 더불어 게임의 내러티브와 여러 가지 목표들은 플레이어가 직선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저마다의 진로를 개발해내고, 방사선과 같이 뻗쳐 나가는 확산적인 배회를 장려한다.


<위쳐 3>의 전체 맵

스테이지 게임의 형식미는 방해물을 뛰어넘으면서 돌파해 가야 하는 진로이자 그 진로에 대한 저항력으로서 공간을 추상화한다. 그러므로 더는 전진할 수 없는 최후의 공간은 여정의 결말이 펼쳐지는 대단원의 무대와 동일시된다. 반면 “오픈 월드”에서, 맵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지역은 끝자락이라는 이유만으로 최후의 조우가 벌어지는 공간적 배경으로 배치될 필연성을 갖지는 않는다. 경향적으로 “오픈 월드”의 주요 이벤트는 전체 지도의 중심부에 밀집되어 있다. 게임의 여러 사건과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지점을 표시하는 지도의 마크가 얼마나 밀집되어 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경향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심부는 플레이어가 게임의 중반 즈음에 진입하고, 그 이후 가장 자주 드나들게 되는 곳이며, 사방으로 “열려 있다”는 점에서 “오픈 월드”의 공간적 한계에서 오는 이질감을 가장 옅게 느끼는 장소이다. <위처 3>의 “노비그라드”나 <폴아웃 4>의 “다이아몬드 시티”에서 그러하듯이, 중심부는 자주 동시대인의 지리적 현실성에 대한 감각에 반응하여 상공업이 활발한 도시, 문명의 중심부, 서로에게 이방인인 자들이 모이고 자본이 축적되는 메트로폴리스로 나타난다. 사건과 갈등과 정치가 중심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연을 지닌 NPC들을 마주친다. 축적해놓은 재물과 귀중품을 팔 상가를 찾을 수도 있다. 중심부는 게임의 엔딩을 보고자 하는 플레이어는 한 번은 반드시 발을 디뎌야 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을 갖는 게임이 무한히 확장되며 무한한 자유를 갖고서 배회하고, 무한히 다양한 사건과 조우할 수 있는 공간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유로운 배회”도 복수의 다발을 가진 플레이어의 진로도 지향될지언정 결국에는 제한될 운명이다. 지도의 어느 경계에 이르러 플레이어는 한 발자국도 더 뻗어 나아갈 수 없는 종막에 도달한다. 경계 너머는 로딩되지 않는다. 경계 너머가 애당초 만들어진 바 없으며, 그러므로 두 영역을 나누는 경계조차 애초에 존재한 바 없기 때문이다. 경계 대신 항시 존재해왔던 건 벽이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영상 작업 <평행 1~4> 연작이 우스꽝스럽고 집요한 충돌을 통해 보여주듯이, 그래픽은 플레이어가 렌더링의 끝을 표지하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게 아니라, 산맥, 강줄기, 절벽과 같은 자연적 지형지물에 의해 진행이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그 주장만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가는 일은 실패하고 만다.


파로키의 <평행> 연작만을 보면 오픈 월드에 있어 경계 너머란 현실성을 자처하는 게임 세계의 가상성과 허위를 폭로하는 시각적 신기루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신기루는 그 착시의 효과가 존속되어야만 하는 신기루다. 오픈 월드가 자청하는 현실주의의 설득력이 지탱되기 위하여 공간은 단절되어서는 안 되고 계속해서 연장되어야 한다. 이곳이 곧 끝이지만, 게임 내적으로 이곳이 곧 끝이라고 선언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설. 경계 부근은 열린 세계의 닫힌 지역이라는 점에서 오픈 월드의 모순이 격화되는 장소다. 그리고 그 모순을 요철 없이 매끄럽게 만들기 위하여, 게임은 시각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다양한 전략을 활용한다.


오픈 월드 게임은 활발하게 변방, 오지, 무인지대에 대한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자주 변방은 천연자원의 제공처로서 나타난다. 오픈 월드 맵의 주변부는 상대적으로 NPC의 인적이 드물며, 사건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황무지, 야생지, 원시림인 경우가 잦다. 자연물은 투명한 벽을 가리는 시각적인 눈속임의 기능으로만 머물지는 않는다. 오픈 월드의 경계지에 도달한 플레이어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하여 게임은 진귀한 광물 자원과 희귀한 동물 가죽을 찾는 등의 보상을 준비해둔다. 손상되지 않은 천연자원을 제공하는 변방을 그리는 가장 대표적인 게임 공간으로서,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북서쪽 산맥 부근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로키 산맥을 본뜬 이 산맥은 되짚어 돌아갈 수 없는 서부 개척 시대와의 단절을 가파르게 물리적으로 표시하며 경외감을 일으킨다. 두꺼운 옷을 인벤토리에 챙기지 않으면 동상을 입게 되는 이 산맥 부근은 희귀한 알비노 물소와 백마가 서성거리며, 가죽이 손상되지 않아 가치가 높은 야생 동물들이 뛰노는 곳이기도 하다. 아트 디렉터 아론 갈버트는 한 인터뷰에서 램브란트와 같은 목가 화가에 덧붙여서 알버트 비어슈타트Albert Bierstadt와 같은 19세기 미국 풍경 화가로부터 <레드 데드 리뎀션 2>가 영감을 받았음을 밝힌다.1) 램브란트만큼 잘 알려져 있진 않은 알버트 비어슈타트는 미국의 자연을 발명하고자 하는 국가주의적 수요에 발맞춰서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서부의 야생지를 그리며 명성을 얻은 자연주의 화가다. 그에 대한 당대의 논평 하나는 그의 풍경화를 “숭고한 자연의 형태와 무례한 야만인의 삶”을 담아낸 “순수히 미국의 풍경”이었노라고 상찬한다.


변방이 만들어진 제국의 자연으로서, 제국의 문명이 결국에 극복하고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서 재현되거나 혹은 해석되어 온 역사는 길고 강고하다. 그것은 변방을 변방으로 여기지 않으며 살아온 선주민의 역사를 망각하는 방식으로 강고해져 왔다. 자연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으로서 널리 알려진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풍경과 알버트 비어슈타트의 연결 고리는 형식 없는 자연이란 언제나 이미 형식으로서 현현함을 한 번 더 상기시킨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목가적 풍경과 대조적으로, <사이버펑크 2077> 세계의 최남단 변방은 동시대의 갱신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를 반영하듯이 메트로폴리스가 토해낸 폐기물이 마천루만큼 드높게 쌓여가는 매립지로 상상된다. 최북단 변방은 가동을 멈춘 유정으로, 주인공의 인격에 빌붙어 사는 전직 로커이자 테러리스트 귀신인 조니의 시체가 유기된 곳이다. 실상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 없는 논평일 때가 잦은 사이버 펑크 세계관에서, 변방은 중심부 도시의 폐기물이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 채 부표로서 매여 있는 토성의 고리이며, 과거의 산업 폐기물과 과거의 저항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폐기되는 곳이다.


또한 모두의 발길이 닿지는 않는 맵의 주변부는 그 게임의 서사적 필연성 외부를 맴도는 존재들을 끌어들여 플레이어를 위한 의외의 조우를 성기게 마련한다. <위쳐 3>은 <레드 데드 리뎀션 2>와 달리 비옥한 자연이 아니라 전란으로 황폐해진 늪지대 벨렌을 의미심장한 변방으로서 제시한다. <위쳐 3>의 세계는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걸쳐있는 유럽 생활사와 민속 신앙 속 이물들이 동위에서 뒤얽힌 세계다. “노맨즈랜드”라는 별칭을 가진 벨렌은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 전의 게롤트가 초중반에 머물며 능력치를 올린 뒤 떠나는 출발점과 같은 장소다. 탈영병을 린치하는 것이 이 동네 오락의 전부고, 돼지와 사람이 뒤엉켜 자는 오두막 몇 개가 비스듬하게 기대선 게 마을의 전부다. 흙길은 가축 오물과 노상 방뇨한 오줌이 끊기지를 않는 장마 속에서 고여 매일 뻘과 다름없는 상태다. NPC에게 말을 걸어도 욕설을 하거나 가래침을 뱉을 뿐이다. 주인공 게롤트는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며 중세 대학 도시, 부농들의 과수원과 농장, 르네상스 극단과 범죄 조직이 들끓는 대도시와 같은 흥미진진한 공간들을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불쾌한 사람들과 불쾌한 공기만 넘치는 벨렌은 돌아갈 이유가 크게 없는 장소이자 변경지대가 된다.


푼돈을 받고서 역사보다 오래되고, 미신적으로 숭배받는 괴물들을 처단하고 다니는 걸 업 삼은 게롤트는 빈곤한 밭과 아이에 매여 돼지와 엉켜 잘 도리뿐인 NPC와 달리 자유로운 이동의 특권을 가지고, 괴수의 미신적인 힘을 조소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의 압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무적의 게롤트도 상대하지 못하는 여성 괴물들이 벨렌의 가장 가난한 경계 지대에서, 늪 지대의 가장 깊은 곳에서 군림한다. 운명의 여신처럼 세 자매인 그들을 게롤트는 스토리 상으로도 퀘스트로도 결코 완전히 죽이거나 이기지는 못한다. 거듭해서 성장하며 거듭해서 정복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특권이 닿는 영토 너머에서 그들은 존재한다. 게롤트는 잊혀진 세 자매의 영토로 돌아와서 그가 비웃던 미신적인 힘에 사로잡히기를 자처한 것처럼 죽은 자의 유품을 구한다.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무익한 싸움을 하고서 덫에 걸린 개처럼 무명의 죽음을 맞는다. 벨렌은 최악의 결말, 최악의 상실을 할당받은 변방, 중세인들 사이에서 근대인과 같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남성 주체이고자 했던 게롤트의 의외의 악몽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변방은 자주 지배적인 현실주의를 반영하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현실주의와의 분절을 도리어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데스스트랜딩>의 타르 강을 떠올려 보자. <데스스트랜딩> 세계에서는 죽은 자가 “BT”로 불리는 반물질 유령으로 변모하기 때문에 시체가 시한장치가 달린 핵탄두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살육은 편리한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무기는 기본적으로 비살상으로 주어지지만,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되면 언제나 트럭에 시체를 켜켜이 쌓는 동작을 진행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폐기하기 위해 달려 가야 한다. 소각로로, 혹은 타르로 가득한 호수와 강으로. <데스스트랜딩> 최북단 변방은 시체를 한 구 한 구 다시 옮겨서 소각해야 하는 소각로보다 편리하게 수장시킬 수 있는 폐기처다. 플레이어는 거대한 타르 강에 시체를 밀어 넣기 위하여 그곳을 찾게 된다. 그 강은 투명한 벽과 달리, 그 무엇도 가라앉은 뒤로 떠오를 수 없고 다가서는 무엇이든 먹어치우고자 하는, 입이 달린 경계로서 숨 쉰다. 시체는 느릿느릿하게 타르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 경계는 벽이라기보다는 현세에 현신한 테티스 강과 같다. 강은 그러나 탐욕스럽거나 두렵기보다는 모든 더러운 육체와 녹슨 폐기물(두 가지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을 삼킬 수 있는 자애로운 구순으로서 상호작용한다.


오픈 월드의 변방은 공간의 차등화와 분절화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논평인 동시에, 현실주의에 반하는 새로운 지리학을 체현하는 픽션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지닌다. 오픈 월드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고 하는 변방은 도리어 서사적 필연성과의 느슨한 관계 속에서 그 “열린 세계”의 정체성을 축약해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1 )Gies, Arthur. “The Painted World of Red Dead Redemption 2.” Polygon, 26 Oct. 2018, www.polygon.com/red-dead-redemption/2018/10/26/18024982/red-dead-redemption-2-art-inspiration-landscape-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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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문학을 전공했다. 게임과 만화를 좋아한다. 특히 테리 카바나, 코지마 프로덕션, 옵시디언의 게임과 이치카와 하루코, 이시구로 마사카즈, 하기오 모토의 만화를 좋아한다. 인터랙티브 VR 작업 <원룸바벨>에 내러티브 디자이너로서 참여했다. 뚜이부치란 필명으로도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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