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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수상작]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의 제4의 벽 활용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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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10. 10.

존재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


퀀틱드림의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은 사람과 무척이나 유사한 안드로이드의 출현 이후, 그들이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SF적 상상력 아래 제작된 게임이다. 스토리라인은 크게 수사 보조 안드로이드 코너, 가정용 안드로이드 카라, 그리고 칼이란 인물을 위해 특별제작된 안드로이드 마커스, 이 셋이 초점화자가 되어 진행된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 장르답게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러 다른 엔딩을 볼 수 있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에서의 ‘선택’은 멀티버스로 통하는 길에서의 하나의 분기점이다. 서사에 개입할 수 없는 게임에 비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그것도 자신의 선택에 의해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은 플레이어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플레이어는 전지자처럼 후회되는 선택이 있다면 되돌릴 수 있고 살리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세이브-로드 할 수 있다.


다만 <디트로이드: 비컴 휴먼>은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의 특질인 그 ‘선택’을 좀더 예리하게 벼리어 플레이어에게 쥐여준다. 이는 게임의 서사와 형식 그리고 외적 체험을 관통하며 영향을 미친다. 물론 예리하게 벼려진 ‘선택’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영리하게 무너뜨린 제4의 벽 덕분이다.


주인공들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서사를 관통하며 여러 번 변주돼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Make your choices. Decided who you are. And wanna become.’ 여기서 최초로 내화와 외화[1]의 연결 지점이 발생한다. 일반적인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의 선택지는 대체로 등장인물(정확히는 플레이어가 컨트롤하고 있는 캐릭터)의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으로 연결될 수 있는 직관적 선택지로 구성된다. [참는다/때린다]와 같은 행동, 혹은 [거실/다락방]과 같은 장소, [“심각한 건 아니에요.”/“죽도록 아파요!”]와 같은 대사 선택지가 그 예이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선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와는 조금 다른 결이 보인다. 게임에서 주어지는 주요 선택지(Make your choices)는 이렇게 묻곤 한다. [기계?/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존재(who you are)에 대한 질문으로써. [불량품 되기/기계로 남기]처럼 존재의 방식(wanna become)에 대한 물음으로써. 그런 물음들은 제4의 벽을 자연스럽고도 영리하게 부술 수 있는 주춧돌이 된다.


사실 플레이어는 이미 외화를 경험했다. 하얀빛뿐인 방에서 플레이어의 세이브-로드를 도왔던 안드로이드 비서 클로이가 바로 그것이다. 최초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클로이는 외부에서의 편의성을 돕는다. 기념일 인사를 하고 때때로 데이터가 날아갔다는 농담도 한다. 심지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왜 인물들을 죽게 했는지, 이제 그만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자는 식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런 클로이의 존재와 발화는 제4의 벽 너머의 플레이어의 존재를 선언함과 동시에, 스토리라인으로서의 내화와 플레이란 체험으로서의 외화를 연결하며 다층의 겹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야기가 막을 내리면, 플레이어는 여지껏 선택지에서는 배제되어 있으리라 생각한 클로이에 관한 선지 앞에 놓여진다. 당신의 플레이를 보면서 깨달은 바가 많다며 자신을 이곳에서 자유로이 해방시켜달라고 말하는 클로이. 플레이어는 선택에 따라 그녀를 해방시켜줄 수도, 이곳에 묶어 둘 수도 있다. 마치 내화에서 코너가 당한 캄스키 테스트처럼. 사이버라이프 창립자 일라이저 캄스키를 조사하기 위해 코너가 형사 행크와 동행했을때, 캄스키는 테스트를 통과하면 그가 원하는 답을 주겠다고 했다. 캄스키는 자신의 비서 안드로이드 중 하나를 코너의 앞에 꿇어 앉히며, 기계라고 생각하면 쏘고 총을 거둔다면 넌 안드로이드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생각하는 것이란 식으로 코너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종용했었다. 자, 이제는 플레이어가 그 테스트 앞에 서게 됐다. 제4의 벽을 앞에 두고 말이다. 제4의 벽을 무너뜨리며 던져진 심오한 질문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메시아 같은 존재로 비유된 ra9이란 존재의 정체로 연결된다.


* 자신의 자유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로딩화면에서의 클로이

    

더욱 이전으로 돌아가서. 사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제4의 벽을 이미 마주한 순간이 있다. 바로 플레이스테이션 시디롬에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란 타이틀이 적힌 시디를 넣는 순간.


게임에서 제리코는 안드로이드들의 이데아로, ra9은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해줄 메시아로서 언급된다. 제리코는 실제 존재하는 지역명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지로 알려진 점, 스토리 내에서는 폐선(廢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비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누명을 쓴 마커스가 폐기장에서 힘겹게 탈출해 좇게 되는 명칭이라는 점, 불량품(감정을 느끼고 자유의지가 깨어난 안드로이드를 인간들은 이처럼 불렀다)들이 벽에 빼곡하게 써내려간 이름이라는 점, 한편으로는 불량품들끼리 희망을 잃지 않으려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라고 의심을 받는 지점까지. ra9이란 존재를 메시아로 연결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출시 당시 게임을 진행해나가던 플레이어들은 시시각각 ra9에 대한 추측을 더해갔다. 최초의 안드로이드라는 설, 처음으로 명령의 알고리즘을 깨고 자유의지를 발동한 카라로부터 시작된 바이러스의 일종이라는 설 등등. 하지만 그 답은 등잔 밑이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다.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시디롬을 다시 열어 게임 타이틀과 제작사, 배급사, 주의사항 등이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천천히 살피다 보면 그 한켠에서 작은 글자, ra9을 발견하게 된다. 즉, ra9는 게임에서의 전지자, 플레이어를 칭하는 이름이었으며 그 모든 건 우리가 알아차리기 전 이미 예정돼 있었다.


* ra9은 위처럼 작은 크기로 씨디에 쓰여 있다

    

이제는 알 수 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스토리 라인을 통해 잘 벼리어진 질문을 플레이어에게 넘겼고, 그것은 제4의 벽을 넘어 마커스, 코너, 카라라는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게 하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선택으로써 초점화자들의 존재방식을 선택한 것처럼, 플레이어는 제4의 벽을 넘어온 질문 앞에서 ra9의 존재방식, 그러니까 우리 플레이어의 존재방식을 택할 수 있다. 그들을 살피어 본 전지자이자 자유를 주는 메시아로서 ra9을 존재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희망을 부추길 뿐이었던 이름뿐인 방관자로서 ra9을 존재하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단지 게임 속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의 고유한 속성인 ‘선택’ 자체를 제4의 벽을 부수는 문법적 도전을 통해 의미화해낸다. 네가 어떤 존재가 될지, 되고 싶은지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자유를 찾아달라는 클로이의 물음이 게임 안과 밖을 연결해내며, 너무나 익숙해 자각하지 못하였던 ‘선택’을 우리는 낯선 감각 속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바로 플레이어인 우리가 유일한 ra9이란 사실과 함께.

     


선택이 보여준 풍경, 그리고 세계 : <언더테일(UNDERTALE)>


RPG 게임의 목적은 전투와 성장이다. 약한 적을 죽이면 다음엔 더 강한 적, 그다음엔 더 강한 적, 결국 보스까지도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그 문법을 과감히 비튼다. ‘THE FRIENDLY RPG WHERE NOBODY HAS TO DIE’란 서브타이틀답게, <언더테일>은 다른 게임에는 없는 자비[MERCY]란 시스템을 제공한다.


스포일러 없이 진행했다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기존 RPG에서의 방식으로 플레이했을 것이다. 레벨을 올리고 경험치를 쌓으며 게임을 진행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쌓여온 RPG의 장르적 문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성처럼 괴물들을 베어가다 보면 최종보스 전 심판의 복도에서, 샌즈의 평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마주한다. 레벨과 경험치로 알고 있던 건 사실 LV(Level Of ViolencE, 폭력 수치)와 EXP(EXecution Point, 처형 점수)였음을. 그제야 플레이어는 <언더테일>이 자신이 익히 알던 RPG 게임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무언가 속은 마음으로 첫번째 엔딩에 다다랐을 때, 플라위는 이제 대놓고 말한다. “처음부터 다시 여기까지 와 봐.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제4의 벽이 무너져내림과 함께 <언더테일>의 메타픽션적 성격이 전방위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플레이어의 2번째 플레이는 시작된다.


<언더테일>은 총 3개의 엔딩을 가지고 있고 보통모드, 불살(不殺)모드, 몰살(沒殺)모드로 불린다. 플라위의 말에 따라 모두를 살려보잔 마음으로 불살 엔딩을 보면, 또다시 플라위는 넌지시 몰살모드를 언급하며 제발 그런 비극을 실행치 말아달라 부탁한다. 오히려 그 루트를 밟길 은근히 유도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다만 그것이 맞다. 애초에 그건 제작자 토비 폭스에 의해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이 각기 다른 하나의 결말을 선택하는 평행우주라면, <언더테일>의 결말은 병렬적으로 동시에 존재하고 그것은 제4의 벽을 통해 전체로서 묶여지는 하나의 우주이다. 플라위의 안내, 몰살엔딩을 보았다면 아무리 세이브-로드를 하고 괴물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차라에게 지배당한 배드엔딩밖에 볼 수 없단 점, 처형의 복도에 플레이어가 몇 번 왔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샌즈까지. 아무리 다시 불러와도 게임 속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제4의 벽에 존재하기에, 여전히 플라위는 우리를 조롱하고 샌즈는 우리를 기억한다. 이처럼, 독립적인 내화와 외화의 영역을 제4의 벽을 통해 확장하는 방식을 선택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달리, <언더테일>은 픽션(서사)과 메타픽션을 제4의 벽을 통해 융화해내는 놀라운 방식을 채택한다.


일반적으로 게임에선 플레이어의 선택은 주인공에게 덮어 씌워진다. 등장인물에게 모진말을 한 건 플레이어의 얼굴이 아닌 주인공의 얼굴로 한 것이다. 적을 공격한 건 플레이어가 아닌 주인공이다. 플레이어의 아바타로 볼 수 있는 주인공을 매개로 플레이하기에, 선택의 의미는 쉽게 희미해져 버린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그것을 비틀었다. 게임의 세계가 그것만의 독립된 서사를 만드는 것이 플레이어의 선택의 의미를 약화시킨다면, 오히려 제4의 벽을 부숨으로써 게임이 게임임을 인식하게 해 선택의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다. 플라위가 죽은 토리엘을 언급하며 죄책감을 부추기는 것, 샌즈가 우리를 향해 ‘심판’이란 단어를 쓰는 것, 되돌릴 수 없는 몰살엔딩. 이 모두가 이에 힘을 실어준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플레이어는 호접지몽에서 깨어난다. 게임에 몰입했기에 오히려 희미해졌던 선택이 제4의 벽의 무너짐으로써, 그곳의 이야기는 이곳의 이야기로 당도하고 선택의 감각은 더욱 선명해진다. 게임 속 서사에 빠져 좁혀진 시야를 넓히자, 게임 속 세상이 아닌 게임이 보여준 세계가 보인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 “선택”의 주체가 플레이어임을 인식하게 한 것에서 <언더테일은> 더 나아가 “선택”이 어떻게 세상의 풍경을 바꾸어 놓는지 보여준다. 기존의 게임 문법을 깨뜨린 <언더테일>의 구조의 힘이 빛나는 지점이 여기 있다. <언더테일>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샌즈의 ‘MEGALOVANIA’가 bgm으로 펼쳐지는 멋들어진 몰살루트 때문만도 아니고, 감동적인 엔딩을 안겨준 불살루트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닫힌 엔딩으로 존재했다면, 몰살루트는 그저 멋진 RPG 게임이 됐을 것이며, 메타적 특성이 없는 불살루트는 조금 진부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언더테일의 매력은 제4의 벽을 넘어 보통-불살-몰살엔딩으로 체험되는 연속성 전체에 있다.


사실 불살루트에서의 [자비]란 시스템은 무척 어렵다. 괴물들을 어르고 달래거나, 공감하고 이해하면 효율과 한참 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뎌지는 진행속도와 수고스러움을 견뎌야 한다. 토리엘에겐 무려 25번의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언다인의 형편없는 요리솜씨를 참으며 친구가 되어야 하며, 죽자고 달려드는 메타톤이 원하는 대로 티비쇼에도 참여해 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효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점차 눈치챈다. 효율을 생각하며 죽이고 능력치를 생각하며 무찌른 보통모드때와 달리, 미묘하게 괴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바뀌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알고 싶어지고 그들의 사연이 궁금하다. 왕실 근위병을 꿈꾸지만 허당인 파피루스, 요리를 전투처럼 해서 집을 홀랑 태워먹는 언다인, 그저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던 시청률에 미친 로봇이었던 메타톤. 그리고 무엇보다 토리엘의 부탁 하나로 지하세계의 여정 내내 숨어(보이는척해)서 우리를 따라왔던, 시시껄렁한 농담과 방귀쿠션을 좋아하는 샌즈까지. 단지 공격하고 레벨과 능력치를 얻는 효율이 아닌, 이 과정 자체에 플레이어는 집중하게 된다. RPG의 문법을 엇나가고 효율은 잊은지 오래며 LV과 EXP는 오르지 않지만, 우리는 즐겁다. 의미없음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 아스리엘이 있다. 아스리엘을 구하는 것은 단순한 해피엔딩으로서의 구원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엔딩을 딛고, 몰살루트를 등지고, 그 힘든 자비를 베풀어가며, 제 4벽을 넘어 그를 구하기로 선택했다. 첫번째로 떨어진 아이를 살리고 싶었음에도 오해를 사 인간들 손에 죽은 아스리엘은 프리스크라는 탈 뒤에 숨은 플레이어를 증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지(♥)[2]로써 몇번이고 자비를 베풀어 아스리엘을 구해(SAVE)[3]낸다. 그의 테마 "Hopes and Dreams"와 "SAVE the World"를 이어붙이면 꿈과 희망이 세계를 구한다는 뜻이 되는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제4의 벽을 넘어 플레이어가 선택한 단 하나의 결말이다.

     

* 그만두고 자신을 떠나라 하는 아스리엘에도 우리는 SAVE를 선택한다

어쩌면 너무 흔하고 당연해서, 유치하다고까지 치부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진실을 그제서야 우리는 마주한다.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의지(♥)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친절을 베풀면 그들을 진정한 모습과 조우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세상이 조금은 다른 풍경을 보여주리라는 것. 그렇게 펼쳐진 풍경은 누군간 동화같이 유치한 일이라 비아냥댈지라도 분명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다시 돌아가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곤 한다. <언더테일>은 친히 그 권한을 플레이어에게 쥐여준 게임이다. 토비폭스가 설계한 보통-불살-몰살이 일반적 루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설계일뿐, 사실 플레이어는 어떤 선택에도 강요받지 않는다. 보통모드 이후 작정하고 몰살모드만 즐기며 플레이 할 수 있고, 차라가 나타나 해피엔딩을 방해하더라도 완전 포맷이후 다시 깔면 된다. 돌아올 때마다 메타픽션 캐릭터들이 이전의 행동을 조롱하거나 기억하고 또 경고할지라도, 그것은 강제의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4의 벽을 통해 <언더테일>이 보여준 풍경을 보았다. 병렬하면서도 하나인 <언더테일>의 우주에서 어떤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는가. 무엇이 오래도록 그것을 기억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만들었는가. 거기에 게임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 모두가 살아남고 아스리엘을 구해낸 뒤 마주하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

    

UNDERTALE에서, ra9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모두가 수긍하고 가장 직관적인 답은 “재미”일 것이다. 그 종류만큼이나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재미는 다양하다. 닌텐도 <동물의 숲>처럼 게임 속 자원을 활용해 자신만의 무언가를 일구어간다는 자율성과 성취감, <리그오브레전드>와 같이 전장에 참여해 그 승패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등.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묻고 싶다. 몰입도를 깨트리고 서사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형식적 문법의 틀을 비틀어 제4의 벽을 부순 게임들. 우리는 왜 그 게임들에 열광했는가. 이 지점에서 게임이, 어쩌면 게임만이 우리에게 체험 가능케 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미학적 정서’[4]란 실제 우리의 인생에선 의미와 정서가 분리되어있는데 반해, 예술에서는 이 두가지가 동시적으로 일어남을 뜻하는 표현이다. 가령 일상에서 시체를 본다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생체반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가장 먼저 공포감 느끼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사람의 죽음, 사연, 그리고 죽음이란 본질에 대한 사유까지 닿을 수 있다. 하지만 서사를 통해서는 그 느낌과 사유는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사를 지닌 게임은 서사가 가진 미학적 정서를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제4의 벽을 무너뜨리는 도전을 감행한 게임들은 그 의미화 너머(meta)의 의미화, 즉 의미화의 의미화를 가능하게 한다.


앞서 언급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은 제4의 벽을 부수어 어떠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게임은 플레이어의 체험을 전제로 한 매체이기에 가능해진다. 일방향적 텍스트 서사는 할 수 없는, 제4의 벽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한 연극에서도 만들어낼 수 없는 고유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대리자로서가 아닌 플레이어 자신으로서 선택하고, 또한 그 선택을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물속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지만, 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돌고래는 물속과 밖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제4의 벽을 부순 게임들은 우리에게 선명한 선택의 감각을 일깨워줬으며, 그것과 우리의 삶을 나란히 맞대어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하였다. 안드로이드가 상용화되는 미래라는 SF적 설정, 독특한 괴물만이 나오는 지하세계란 배경에도 두 게임서사가 핍진성을 얻는 이유다.


우리는 세상을 스토리텔링으로써 이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5]. 그것이 우리가 서사를 즐기는 이유일 것이다. 그 다층적 차원을 제4의 벽을 활용해 그려낸 게임들이 플레이어에게 선물한 경험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것 또한 사실 한낱 데이터 쪼가리이지 않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가. 때론 어떤 진실은 긴 우회로를 통해서야만 그 틈을 잠시 잠깐 들여다볼 수 있다. 어떤 이론적 분석 없이도 플레이어들은 이 한가지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게임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답이다. 무질서한 삶 속에서 진실을 향해 예민하게 본능적으로 뻗어진 우리의 안테나는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지표일 것이기에[6].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게임은 그 서사를 넘어 게임을 플레이한 종합적인 경험 그 자체가 삶과 매우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고(Sid Meier, 게임제작자),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Jean-Paul Charles). 어쩌면 이렇게 둘은 쌍둥이처럼 닮았기에 우리 플레이어들은 불가항력적으로 게임에 이끌리는지 모른다.




[1]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이 제4의 벽을 활용한 방식을 ‘액자식 구성’이란 기존 문학용어를 빌려 설명하고자 했다. 마커스, 카라, 코너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스토리라인을 내화로, 플레이어로서 체험하는 로딩화면의 클로이와의 상호작용을 포함한 플레이 전체를 외화로 보았다.
[2] 원문은 determination. 언더테일 세계관에서 인간이 죽어도 영혼을 남게하는 힘으로, 이 덕에 주인공(플레이어)은 세이브-로드가 가능하다. 이런 설정은 서사와 메타픽션의 연결 매끄럽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것이 마음이 깃들었다 믿는 심장을 상징화한 기호 “♥”를 사용한것도 무척 눈여겨볼만 하다.
[3] 아스리엘 전투에서 [SAVE]가 [ACT]를 대신한다. 그를 구하(save)는 것은 게임 밖에서의 save-load와 겹쳐보이며 괴물을 비롯한 모두를 살리기 위해 했던 노력과 내었던 의지(♥)를 떠올리게 한다.
[4] 로버트 맥키,「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고영범, 민음인 2018, 171-174p.
[5] 김주환, 「내면소통: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근력 훈련」, 인플루엔셜, 2023, 156-7p.
[6] 로버트 맥키,「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고영범, 민음인 2018, 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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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Life is strange>.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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