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제 민첩은 몇 점인가요?
22
GG Vol.
25. 2. 10.
민망한 말이지만, 난 내 캐릭터들에게 그리 좋은 부모는 아니다. 한 명 잘 키워보려면 따져야 할 게 뭐 이리 많은지. 어떤 스킬을 획득해야 하고, 어디에 비용을 투자해야 하고, 어떤 무기를 쥐어줘야 하고, 그 무기는 어떻게 갈고닦아야 하고...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골치 아프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과거에 취했던 방법은, 최대한 많은 자원을 모아서 최대한 많은 옵션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레벨을 끝까지 올리고, 스킬 트리에서 가능한 모든 스킬을 획득하고, 가진 장비를 모두 강화했다. 그러나 현시대의 ‘캐릭터 육성’ 시스템은 내 무식한 방법론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었다. 급기야 <원신Genshin Impact> 같은 수집형 RPG에 이르러, 나는 내 손에 있는 모든 캐릭터를 키울 수 있는 자원 분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결국 목적은 하나다. 강한 캐릭터를 만드는 것. 게임 속에서 나를 대신할 이 캐릭터가 강력하고 유능하며 뛰어나길 바란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 보상을 얻길 바란다. 다른 플레이어를 짓밟을 수 있길 바란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능감을 추구한다. 강한 공격력, 화려한 스킬, 다양한 장비들을 통해 강화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들로 이 가상의 세계를 제약 없이 마음껏 누비는 것, 이는 현실에서의 내가 쉽게 얻을 수 없는 효능감이다. 검 하나를 제대로 쥐기까지도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할뿐더러, 그렇게 연습한다고 해도 검에서 불을 뿜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는 손쉽게 영웅이 되고, 악당이 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이 된다. 현실에서는 매일 아침 침대에 누워 체육관에 가야 할지 고민하는 나지만, 가상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더욱 큰 강함을 추구하며 부단히 내 몸을 단련하는 것을 일상처럼 여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실에서 내 몸을 단련하는 것과는 원리와 방법부터 다르다. RPG에서 강한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나와의 싸움이 아니라, 기나긴 숫자와의 싸움이 아니겠는가.
맥락을 가진 수치들의 집합
RPG의 규칙은 수치의 미학이다. 비디오 게임뿐 아니라, 종이와 펜으로 즐기는 TRPG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은 수치로 표현된다. 단순히 힘이 센 캐릭터, 튼튼한 캐릭터, 민첩한 캐릭터라는 수사가 아니라, 정확한 수치로 나타내는 게 먼저다. <크툴루의 부름Call of Cthulhu>에서는 체력, 근력, 그 밖의 무기 사용 능력 등을 수치화하며,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Vampire: the Masquerade> 같은 작품에서는 더 나아가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의 종류 및 등급까지 수치화한다.
신체적 능력이 수치화되고 나면, 이때부터 게임과 플레이어의 모든 상호작용은 수치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적과 공방을 주고받은 결과, 어떠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 현재 나의 상태 등이 끊임없이 기록되고 계산되며 게임이 진행된다. 내가 얼마나 유능한지, 또는 무능한지,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는 결산된 수치를 통해 확인된다.
캐릭터의 성장 역시 수치화되어 기록된다. 한 턴이 끝날 때마다 해당 턴의 활동 내역을 반영해 기존의 수치가 재조정되거나, 일정 수치 이상의 경험치를 달성하고 레벨이 한 단계 오를 때마다 기존의 수치에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이 주어진다. 특히 대부분의 비디오 게임에서는 조건을 달성할 때마다 자원을 공급하는 방법으로 성장을 제어한다. 자원은 유한하기에, 플레이어는 이를 캐릭터의 어떤 측면을 성장시키는 데에 활용할지 고민한다. 과거의 나처럼 최대한 많은 자원을 확보해서 모든 옵션을 획득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이 방법은 쉽지도 않으며,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스킬 트리의 몇 가지 경로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강제된다면, 이제 나는 내 캐릭터의 진로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체적 능력을 보강해 주는 장비의 능력 역시 수치로 표기된다. 장비는 각자가 또 다른 캐릭터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 이에 기반한 상호작용, 그리고 자원을 투입한 성장. 여기에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장비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한다. 지금 획득하는, 기본 수치가 높지 않은 장비에 자원을 투자해서 성장시킬 것인지, 후에 획득할, 기본 수치가 높은 장비에 사용하기 위해 절약할 것인지.
RPG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신체적 조건을 살피기 위해 명확한 수치와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비단 신체적 조건뿐 아니라 정신적, 기타 다양한 능력적 조건들까지 캐릭터가 가진 모든 조건들은 수치 정보로 관리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수치들과, 수치들의 증감을 관리하는 수식만 제공된다면 RPG를 설계하고 플레이할 수 있다. RPG 캐릭터의 신체라는 것은, 이 수치들 중 일부에 ‘힘’, ‘민첩’, ‘체력’ 등의 서사적 맥락을 갖춘 단어와, 개연성을 갖춘 수식을 부여함으로써 형성된다.
플레이어들은 각 수치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 현실에서 개념을 가져온다. 이 수치들은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캐릭터에 언제나 동반되는 내재적 수치, 활성화 상태에서만 동반되는 외재적 수치. 플레이어들은 전자를 캐릭터의 몸과 연관 짓고, 후자를 캐릭터가 선택해 사용하는 도구와 연관 짓는다. 각 수치에 이러한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 게임 디자이너들의 일이며, 이를 설득력 있게 해내기 위해서는 신체 능력에 대한 본능적인 이해에 기인할 수밖에 없다.
A가 상승하면 B도 상승할 수 있다. 이 수치들 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현실 감각에 기반한 맥락이다. A와 B를 각각 근력과 공격력, 또는 기력과 이동속도라고 생각하면, 이 수치들의 관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A와 B의 자리에 지구력과 적 시야가 들어가진 않는다. 현실 감각에 기반한 연관성을 도출할 수 없는 관계는 파악할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없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통해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시작 단계인, 캐릭터와의 동기화조차 어려워진다.
수치의 증감과 자원의 순환
개별적인 수치들에 맥락을 부여하고 설득력 있는 상관관계를 설정하면, 이제 게임 속 캐릭터는 또 다른 나로 인식되며, 게임 속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비슷한 속성의 현실적 개념들로 치환되고, 게임은 또 다른 현실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설계와 과정들은 RPG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고도화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 공식처럼 자리 잡은 구조가 있다. 대표적 RPG 중 하나인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2020)>의 성장 시스템도 이를 보여준다. 앞서 말했던 내재적, 외재적 수치를 각각 신체와 장비라는 범주로 치환해 설명해 볼 때, <사이버펑크 2077> 속 캐릭터의 신체를 형성하는 다양한 수치(우리가 흔히 스탯Stat이라 칭하는)들은 이 2가지 수치의 복잡한 결합 끝에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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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펑크 2077>의 신체는 경험치를 축적해 얻은 포인트의 투자로 강화된다.
<사이버펑크 2077> 속 캐릭터의 신체는 크게 ‘특성’이라 불리는, 5가지 영역의 수치에 기반한다. [신체, 반사 신경, 테크 능력, 냉정, 지능]이라 명명된 영역은 각각 [체력, 치명타 확률, 방어력, 치명타 피해량, 램]이라 명명된 수치에 영향을 준다. 각 특성의 하위에는 많은 ‘특전’들이 서로 얽혀있다. 우리가 흔히 스킬이라 부르는, 캐릭터가 플레이 중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이다. 신체 능력 자체를 강화해 주거나 독특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이 특전들은 종종 상호 간 선후행 등의 상관관계로 얽혀있다.
이 내재적 수치들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자원은 플레이 중 캐릭터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축적된다. 이른바 ‘경험치’다. 경험치가 축적되면 레벨이 오르고, 포인트를 획득한다. 플레이어는 이 포인트를 원하는 특성과 특전에 투자해 캐릭터를 강화한다. 이 자원은 철저히 무형으로, 외부 환경과의 거래와 양도가 불가능하며, 캐릭터 내부에서 발원해 캐릭터 내부로 환원된다. 이는 장기적으로 캐릭터가 어떤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어떤 전투 스타일을 가진 용병으로 성장할지, 그러니까 캐릭터의 장래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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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 수치에 영향을 주는 장비는 무기와 사이버웨어를 포함한다.
캐릭터가 사용하는 장비는 성장에 있어서 캐릭터와 유사한 방식을 가진다. 능력을 나타내는 초기 수치가 있고, 이는 장비의 성격, 또는 이젠 상식처럼 자리 잡은, ‘색’의 문법으로 나타나는 장비의 등급에 따라 달라진다. 각 장비마다 허용되는 개수의 부속품과 부품을 장착해 수치를 추가적으로 조정한다. 마치 캐릭터와 장비의 관계처럼, 이 역시 각자 다른 수치를 가진 부속품을 선택해 장착함으로써 해당 수치를 일시적으로 활성화한다.
외재적 수치의 성장에 투입되는 자원은 형태를 가진다. 업그레이드용 부품, 그리고 돈. 플레이어는 이를 다양한 장소에서 줍거나, 의뢰비 또는 해킹을 통한 전산 조작으로 계좌에 입금되는 액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자원들은 성장 외에도 다양한 목적과 방법으로 쓰일 수 있으며, 철저히 캐릭터 외부의 환경에서 순환한다. 장비에 얼마의 자원을 투자해 얼마나 개량을 했던, 해당 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 수치들은 캐릭터와 게임 플레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육성되는 내면, 개조되는 외면
RPG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통해 효능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몸과 나의 몸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캐릭터의 몸(수치)을 둘러싼 맥락들이 현실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다양한 내재적, 외재적 수치를 마련했고, 현실적인 맥락도 갖췄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이 어떻게 플레이어에게 효능감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내가 막강한 존재고, 게임에 존재하는 모든 적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지루하다고 표현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나 쉬워서 오히려 어떠한 효능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와 대등한, 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가 나를 막아서고, 그래서 목표를 이루는 것에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어려움이 생긴다면, 우리는 이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한 조치들을 취한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만족과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는 이를 ‘성장’이라고 부른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 앞으로 맞닥뜨릴 더 큰 난관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RPG의 성장 역시 현실적인 맥락을 가진다. 근력을 많이 사용하면 근력이 증가하고, 무기에 업그레이드 부품을 투입하면 성능이 증가한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감각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RPG의 캐릭터 성장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캐릭터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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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스킬 분야의 성장은 해당 스킬 분야의 투자로 환원된다.
<사이버펑크 2077>에서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스템이 ‘스킬’이다. 스킬은 [솔로, 엔지니어, 시노비, 넷러너, 헤드헌터]의 5가지 분야를 가지며, 각 분야에서 제시하는 특정 행위를 통해 획득하는 경험치를 체크한다. 그렇게 각 분야에서 일정 레벨을 달성할 때마다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는 보상을 제공하는데, 이 역시 각 분야와 관련된 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성을 가진 보상이다. 내 캐릭터가 넷러너 분야의 경험치를 많이 획득해 레벨을 올리면, 그로부터 얻는 보상을 통해 넷러너로서의 조예가 깊어진다.
RPG가 플레이어들에게 묻는 기본적인 질문 중 하나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이다. 그리 거창하게 생각할 질문은 아니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내 성장 방식은 내 캐릭터가 무엇이든 잘 하는 만능이 되길 바라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실제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선호하는 전투 방식과 무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플레이 스타일이 자리 잡고 나면, 플레이어는 더욱 뛰어난 암살자나 격투가가 되기 위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자원을 투자한다. 같은 RPG를 플레이하더라도 각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은 각자의 욕망만큼이나 다채롭다.
여기에 내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끼는 시스템이 있다. RPG가 플레이어에게 제안하는 성장 방식은 보통 플레이어가 가진 욕망을 캐릭터에게 투사함으로써 관념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방향에 가깝다. 앞서 말했듯이, RPG 캐릭터의 몸은 맥락을 가진 수치들의 집합으로 구축된다. 플레이어들은 이 가상의 몸에 근육과 장기, 뼈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사이버펑크2077>은 여기에 ‘사이버웨어’라는 맥락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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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웨어 시스템은 관념적인 신체를 실재적인 신체로 상상하게끔 한다.
사이버웨어는 엄연히 장비, 그것도 다른 RPG에서 흔히 퍽, 부적 등의 개념으로 쓰이는 부가적 강화 장비다. 무기처럼 들고 휘두를 수 없고, 방어구(<사이버펑크 2077>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처럼 전투의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지도 않으며, 장착 시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몇 가지 내재적, 외재적 수치를 조정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한다. <사이버펑크2077>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강해지고 싶다면 몸을 개조하라.’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골격, 신경계, 순환계, 외피 등 다양한 부위에 사이버웨어를 장착한다. 각 부위에 장착할 수 있는 사이버웨어는 해당 부위의 특성과 연결된다. 이로써 캐릭터가 단순히 수치로만 이루어진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각 부위가 기능하고 피가 순환하는 신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플레이어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강화하기 위해 현실 감각을 기반으로 어떤 신체 부위에 어떤 사이버웨어를 장착해 어떻게 ‘개조’해야 할지 구상한다. 이 개조를 몸이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 ‘사이버웨어 용량’도 고려하면서.
사이버웨어와 같은 맥락의 성장 시스템은 고전적인 방어구 시스템의 연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몸 위에 덧입으면서 추가적이고 일시적인 신체 기능 조정의 효과를 가지는 방어구 시스템의 개념에 비하면, 사이버웨어는 동일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보다 직관적으로 신체를 강화해 준다는 맥락을 제공한다.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경험치를 쌓고 포인트를 얻어 무형의 신체적 역량을 전문화하는 동시에, 다른 편에서는 실체를 가진 몸에 사이버웨어를 박아 넣는 신체 개조가 이루어진다.
분석하고, 전략을 짜고, 실행할 것
게임 인생의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RPG를 플레이하면서 예전처럼 최대한의 자원을 모아 모든 옵션을 획득하는 성장 방식을 취할 수 없었다. 내 캐릭터가 더욱 강하고, 빠르고, 유능해지길 원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선순위를 매기고,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이는 단순히 내가 가지고 싶은 스킬을 획득하고, 좋아 보이는 장비를 캐릭터의 손에 들려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에겐 전략이 필요했다. <아노 1800Anno 1800>이나 <파이어엠블렘: 풍화설월Fire Emblem: Three Houses>을 플레이할 때의 내가 필요했다.
RPG의 규칙은 수치의 미학이다. 이 규칙이 고도화될수록, 플레이어들이 교감해야 하는 수치와 수식도 고도화된다. 플레이어들은 더욱 강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계산한다.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개발용 어들을 가져오며, 각종 수치를 분석하고, 차트를 만들고, 성장 공식을 유추한다. 적 또는 다른 플레이어를 압도할 수 있는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경로와 해결책을 찾는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RPG에서는 플레이어 본인의 신체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RPG에서 캐릭터를 강력하게 성장시키는 것은 플레이어의 전략적 사고, 소위 ‘뇌지컬’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실 경영에 가깝다. 수치로 구성된 가상의 몸에 대한 보고서를 실시간으로 받아보며,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지, 가용 자원이 얼마나 되며 이를 어디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흑자를 볼 수 있을지 계산한다. 플레이어는 정서적으로 이 몸과 동기화된 주체이면서도, 이 몸 자체는 플레이어가 실험대에 올려놓고 조목조목 뜯어봐야 하는 타자화된 객체다. 이 구조 안에서 몸이라는 것은 현실에서처럼 수양의 대상이 아닌 경영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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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릭터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수치는 한 페이지로 요약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신체 경영의 개념이 점차 현실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RPG가 구사했던 신체 능력의 수치화는 현실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의 몸과 관련된,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들을 여러 요소로 규정해 수치화함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만들었다. 솔직히, 끝내주게 편리하고 매력적인 개념 아닌가. 인간을 구성하는 모호한 개념들을 객관적인 수치로 가시화할 수 있다니. 타인과의 우열을 명확히 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몸을 얻기 위한 전략까지 제공받을 수 있다니.
그렇다 보니, 이제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인간을 수치화하길 원한다. 인간의 체력, 지구력, 민첩성 등을 수치로 계산해 분석함으로써 인간을 파악할 수 있길 희망한다. 실제로 스포츠 현장에서는 선수의 신체 능력을 계량화하여 경기력 증진을 위한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으니, <FC 온라인FC Online>이 제공하는 맥락과 현실이 그리 다르진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개념을 현실에 완벽히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기진 않으리라 나는 믿는다.
현실을 매혹하는 몸의 수치화
우리는 우리의 몸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의 신체 기능과 능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완벽히 파악이 끝난 상태인가? 수천 년에 걸친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파킨슨병을 초래하는 명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스포츠계에서는 해당 종목에서 요구되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에 이러한 계량화가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규정한 요소에 자의적으로 계산한 수치를 넣어 서로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이를 반대로 보면, 여전히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고 수치화되지 않은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먼저 규정되고 수치화된 요소가 있다는 것은, 해당 사회에서 그 요소를 다른 요소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그 요소를 특정 방식으로 수치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판단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게임에서 어떤 요소를 규정하고 수치로써 다룰 것인지는, 디자이너가 그 게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에 따라 결정된다. 현실에서 어떤 요소를 규정하고 수치로써 다룰 것인지는, 현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에 따라 결정된다.
현실에서는 때로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를 ‘기적’, 또는 ‘절실함’ 같은 단어로 표현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그간 규정되고 수치화되지 않은 신체적 요소와, 우리가 주목하지 않은 상관관계가 작동한 결과일 수도 있다. 자신의 몸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편의상 판단한 규칙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수집형 RPG의 규칙으로도 확대된다. <원신>의 기본 멤버들에게 열심히 경험치 아이템을 먹이는 나를 보며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애들이 많은데 왜 아직도 걔네를 키워요?’라고 묻는다. 수집형 RPG에서 캐릭터는 장비의 일종이다. 등급이 나뉘어있고, 기본 능력과 성장의 한계에도 차이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 바꿔 끼울 수 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요건들로 복잡하게 구성될 태생적 차이를 별의 개수나 색으로 간단하고 명쾌하게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할지, 버려야 할지가 한눈에 보인다.
엄연히 장비화되었지만 캐릭터의 역할도 하는지라, 현실의 사람에게도 이렇게 명확한 규칙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의 등급을 매긴다는, 인간의 오랜 본능과도 맞닿아있으니. 온갖 요소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계산하기에 앞서, 사람 자체를 단순하게 등급화해 우열을 가리는 것이 훨씬 편리하긴 하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기준을 만드는 우리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가, 신뢰할 수 없는 판단 기준을 통해 산출된 등급에 따라 사람을 대우하는 것은 적절한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다.
현실을 모방하기 위해 구성된 수치의 묶음으로 RPG 캐릭터를 구현했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우리는 실체를 가진 우리의 몸을 수치로 채우고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객관과 논리의 가치에 열광하며, 모든 것을 측정해 가시화한다. 그러나 그렇게 재구성된 우리의 몸은 정말로 본래의 우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RPG 캐릭터의 몸을 단련하는 전략적 뇌지컬만으로, 현실 세계의 몸에서도 성장을 통한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가? RPG의 수치를 읽어나가는 눈으로 현실을 읽어나가는 것은 가능한가?
이 수치들의 조합은... 무궁합니다.
객관적 수치로 이루어진 RPG 캐릭터의 몸은 현실 속 인간의 몸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공정하며, 신뢰할 수 있다. 자원을 투자한 만큼 성장할 수 있으며, 대체로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수치를 읽어나가는 충분한 감각만 있다면, 어떤 상태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눈에 보인다. 현실에서는 가능성이지만, RPG에서는 확신이다.
때문에 가장 효율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왕도가 존재한다. 추천 트리, 빌드, 다양한 비법서들이 개발되어 공유된다. 얼마나 빨리 캐릭터를 성장시켜 게임을 끝내는지 경쟁한다. 늘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RPG는 자신이 얼마나 전략적이며 유능한지 부단히 경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다. 전략성이 곧 캐릭터의 신체적 강력함으로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만 가끔은, 정해진 길로만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가 RPG의 재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생에 정해진 길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도 효율을 운운하며 우리를 제약하는데, 게임 속에서 펼쳐진 새로운 인생에서까지 늘 효율을 따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끔은 캐릭터를 경영하며 스킬 포인트를 어떻게 확보해 투자하는 것이 가성비가 좋을지 궁리하는 내게 묻는다. 게임 속에서까지 정답을 찾느라, 쓸데없는 재미를 추구하는 게이머의 사명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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