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즌 슬리퍼>: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22
GG Vol.
25. 2. 10.
※ 스포일러가 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슬리퍼(Sleeper)[1]
인류는 늘 유한성에 저항해 왔다. 이러한 저항은 단지 물리적인 제약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착화된 이념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한성에 대한 저항은 어떤 의미인가? 이 글에서는 저마다의 '몸에 새겨진 꿈'으로부터 그 답에 다가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몸은 지극히 사회적이며 개인적인 신체를 뜻한다. 그리고 꿈은 희망과 절망을 의미한다. ‘꿈을 꾸는 것’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자,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헛된 기대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놓지 않는 우로보로스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몸에 새겨진 꿈이란, '나'에게 얽매여 있는 내외부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여러 주체들의 염원이다.
신체와 사회라는 이중벽
모든 생명은 신체를 갖고 살아가는 한 여러 한계를 지닌다. 인간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비롯해 사회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제약을 지닌다.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일들도 결국 '나'를 제외한 세계에 연루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 미래에, 나의 신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이러한 상상은 사실 공상 과학 영화나 문학, 그리고 게임에서 자주 다루어져 왔다. 주로 인간의 신체를 영구적으로 개조하거나 안드로이드에 의식을 이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는 단지 기술 발전에 대한 인류의 환상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신체에 내재한 사회적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새로운 신체를 획득하는 것에 대한 상상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조망하고,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어떤 조건들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즉 한정된 신체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저 강력한 힘이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일만을 지시하진 않는다.
게임 개발사 점프 오버 디 에이지(Jump Over the Age)의 <시티즌 슬리퍼(Citizen Sleeper)>(2022)는 앞서 서술한 논의를 아우르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자신의 신체와 출신지를 떠나 눈(eye)이라는 도시에 이제 막 도착한 '슬리퍼'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슬리퍼는 인간의 의식과 로봇의 몸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눈의 시민은 대다수가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슬리퍼는 철저히 외부인으로 취급된다. 그는 자유와 행복을 찾아 이곳으로 도망쳐 왔지만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꿈을 간직한 채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슬리퍼라는 '주체'를 경험할 수 있도록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 기반의 내러티브적 설정을 활용한다. 즉 시스템의 불가변성과 플레이어의 자율성을 동시에 수용함으로써, 견고하고 거대한 사회에 맞서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게임의 시스템은 현대 사회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를 투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신체와 사회로 쌓아 올려진 이중벽을 마주한 채 슬리퍼로서의 꿈을 지켜내야 한다.
시스템 사이를 떠도는 ‘나’
TRPG 시스템은 가상 세계에서 통용되는 공동의 규칙을 갖는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그 범위 안에서 행동을 수행해야 한다. <시티즌 슬리퍼>의 주요 규칙은 다음과 같다. 우선 사이클마다 무작위로 주사위가 부여되며, 그 값은 슬리퍼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슬리퍼의 몸 상태가 나쁘면 주사위의 개수가 줄어들고 행동 성공률이 낮아진다. 주사위는 돈을 벌고, 노동을 하고, 사람을 사귀는 등 행동하는 데에 쓰인다. 반복이 불가능하거나 연한이 정해진 행동이 있다. 주사위를 모두 소진하면 더 이상 행동을 수행할 수 없으며 사이클을 종료해야 한다. 방금 살펴본 것들은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없는 부분으로 제한적이다.
또한 게임의 시스템은 내러티브 안에서 심리적인 제약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과거 노예 로봇이었던 슬리퍼는 눈에서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이는 에피소드 초반부터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여러 번 고민한다. 간혹 도와주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눈의 사회는 그들의 호의를 의심하게 만든다. 게다가 슬리퍼의 몸체는 의도적 구식화를 겪고 있다. 일정 기간 내에 제조사에서 판매하는 전용 영양제를 투여하지 않으면 기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곳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없다. 이로써 슬리퍼의 컨디션은 급격히 나빠지고 행동 성공률도 낮아지게 된다. 눈의 사회는 슬리퍼의 주체성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앞서 살펴본 두 요소는 슬리퍼의 행동에 제약을 준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 사이에 자신의 관점을 투영함으로써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우선 <시티즌 슬리퍼>는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능력과 성격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한눈에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정보다.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자신을 중심으로 캐릭터를 바라보게 된다. 즉 플레이어의 내면이 캐릭터의 자아에 투사되는 것이다[2]. 그리고 이는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플레이어이자 캐릭터인 '나'를 통해 슬리퍼의 주체성으로 발현된다. 또한 눈이라는 낯선 사회로의 진입은 플레이어와 슬리퍼에게 동등하게 주어진다. 예측 불가능한 삶에 갑작스럽게 불시착한 그들은 서로 결속을 다진다.
그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는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에 즉각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에피소드는 주로 등장인물 간의 대화로 진행되는데, 이때 플레이어는 슬리퍼의 태도와 행동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주어진 임무를 모두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초반에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 점차 적응하면서 진취적인 태도로 나서게 된다. 이처럼 <시티즌 슬리퍼>의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일정 부분 제약을 주지만, 결정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거부와 순응, 저항의 강도, 가치의 추구 등에 대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슬리퍼로서의 꿈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삶의 주도권은 자꾸만 사회로 되돌아가려 한다. 슬리퍼라는 존재가 가진 근원적인 한계일까? 이곳에서는 '내일'을 맞이할 권리가 이상하리만치 멀게 느껴진다.
슬리퍼, 꿈의 의미
<시티즌 슬리퍼>는 개인이 대항할 수 없는 사회의 불가변성을 시스템의 중심에 두었다. 그리고 신체가 가진 제약도 결국 그로부터 비롯됨을 플레이어 스스로 인지해 나가도록 했다. 이 게임에서의 자율성은 슬리퍼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넘어, 사회에 내재한 비판 거리를 취할 수 있는 권한으로 확장된다. 특히 에피소드마다 제공되는 시적인 글은 슬리퍼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함축하는 의미를 다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는 처음에 제시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인류가 한정된 신체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해 온 이유에 조금이나마 다가서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발견한 '슬리퍼'와 '꿈'에 담긴 의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슬리퍼는 인간의 신체로부터 벗어난 존재다. 즉 과거에 지니고 있던 어떤 제약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슬리퍼는 신체와 사회라는 이중벽에 또다시 직면했다. 슬리퍼의 본체인 인간은 떠나온 곳 어딘가에 여전히 잠들어 있다. 즉 슬리퍼는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의 꿈인 것이다. 또한 슬리퍼에게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데이터화되어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이는 대체로 무더움, 차가움, 쓰라림, 딱딱함 등 '로봇의 몸으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에 대한 것들이다. 슬리퍼는 몸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 날 때마다 감각과 사고 사이에 지연을 느껴 혼란스러워한다.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몸에 대한 감각은 슬리퍼의 기억 안에 정보로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슬리퍼는 인간인가, 로봇인가? 사실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슬리퍼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눈의 사회,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플레이어에게는 이에 대항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 또한 슬리퍼에 내재한 꿈으로 흡수되고야 말았다. 결국 한정된 신체로부터의 해방은 '나'를 규정하는 사회,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집단적 이념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즉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고 지켜내기 위한 예사로운 투쟁이다.
사실 슬리퍼의 꿈은 정말 사소했다. 그는 단지 살고 싶었다. <시티즌 슬리퍼>의 결말은 그 꿈이 희망이었는가 절망이었는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내일을 꿈꿀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메시지가 암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슬리퍼는 모순된 존재다. 누군가의 이루어진 꿈이 다시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의 속성은 본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희망과 절망, 현실과 이상, 기대와 좌절,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것이 바로 꿈의 의미다. 저마다의 몸에 새겨진 꿈은 이 궤도를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된다.
[1] 이미지 출처: https://www.pointnthink.fr/en/interview-gareth-damian-martin-2/
[2] 이승제, 정의준, 김정애, “청소년 대상 TRPG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위한 콘텐츠 개발연구 -청소년의 정서적 외로움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겨레어문학 제73집, 2024, p.6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