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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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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8. 10.

‘게임 보기’의 역사는 ‘게임 하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오락실에서 동네 고수의 플레이를 어깨 너머로 바라보던 시기부터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전 세계 게이머의 플레이를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는 지금까지, 타인의 게임플레이를 관람하는 형태는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게임 보기’는 단지 프로게이머들의 대전을 관람하는 스포츠의 형태나 고수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감탄하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게임 하기’가 되어 간다. ‘게임 보기’를 기존의 게임에서 구성되는 매직서클의 바깥에서 매직서클 내의 세계와 규칙에 동참하는 메타-게이밍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게임과 게이머 사이에 형성된 매직서클을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의 관계로 확장한다. 이때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채팅을 통한 것 이외에도 각 플랫폼 별로 존재하는 후원 기능과 그에 따른 리액션 및 미션을 통해 작동하는데, 이는 스트리머-시청자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규칙으로서 매직서클을 구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을 바라보자. 사실 호러 게임은 꽤 마이너한 장르에 속한다. 물론 좀비물의 성격을 차용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장르적 요소를 가져오거나,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처럼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AAA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AAA 게임의 적지 않은 수가 폭력과 유혈을 동반하는 고어 묘사를 하고 있다는 지점도 호러 게임이 마이너한 장르라는 것의 반례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대다수가 인디 게임으로 분류되곤 하는 게임들은 주로 플레이되기보단 스트리머에 의해 송출되고 시청자에 의해 관람된다. <프레디의 피자가게>부터 <파피 플레이타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히트 호러 게임은 출시 직후 스트리밍 플랫폼을 도배하곤 한다. 다만 이런 스트리밍에서의 성공 사례가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의 수로 직결되진 못한다. 스팀의 동시접속자 수나 인기차트와 같은 지표들은 멀티 플레이 게임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와 같은, 극소수의 성공 사례만을 알려줄 뿐이다.


* [그림1, 2] <파피 플레이타임> 스크린샷과 <DON’T SCREAM> 스크린샷(출처: 스팀 상품페이지)

     

새로이 등장하는 호러 게임들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만 같다. 앞서 언급한 <프레디의 피자 가게>나 <파피 플레이타임>처럼 온라인상에서 밈이 되어버린 게임, 혹은 ‘사이렌 헤드’나 ‘백룸’ 같은 온라인 괴담의 인기에 힘입어 등장한 여러 게임은 게이머 개개인이 그것을 플레이하는 것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스트리머-시청자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소화된다. 나아가 <DON'T SCREAM>의 성공 이후 우후죽순 등장하는, PC의 마이크를 인식해 소리를 내면 살인마나 크리처에게 살해당하는 구성의 호러 게임들은 스트리머가 점프스케어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모습 자체가 스트리밍의 주된 콘텐츠임을 드러낸다.

     

물론 이와 같은 과정은 굳이 호러 게임이 아닌 게임의 스트리밍에도 크게 다르지 않게 작동한다. <배틀그라운드>나 <리그 오브 레전드>처럼 고인물이 수두룩한 게임의 스트리밍 시청자들은 그들의 실력을 보기 위해 미션의 형태로 제약 플레이를 하게끔 한다. 따라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 또한 게임이 제공하는 규칙을 두고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에 발생하는 새로운 유희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실력이 부족한 게임을 대신 해주는 고인물들의 플레이를 보듯 호러 게임이 너무 무서워서 하지 못하는 시청자는 스트리머의 플레이를 본다. 혹은 호러 게임이 제공하는 공포의 상황을 상쇄시켜주는 스트리머의 리액션을 즐기기 위해 그것을 본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호러 게임과 가장 자주 비교된다고 할 수 있을, 호러 영화 이야기로 잠시 넘어가보자. 호러 영화의 관객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점프스케어를 비롯한 효과를 포함한) 폭력성 앞에 취약한 상태로 놓인다. 동시에 관객은 자신이 스크린 속 살인마나 초자연적 존재에게 직접 위협을 당하지 않는 안전한 객석에 앉아 있을 뿐이기에, 자신의 취약성을 내주고서도 호러 영화의 이미지가 제공하는 폭력을 하나의 유희로서 즐길 수 있다. 이는 영화뿐 아니라 호러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혹은 SCP 재단과 같은 온라인 호러에도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림 3] 스트리머/유튜버 풍월량의 호러 게임 스트리밍 썸네일 (출처: 풍월량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40TDKZkVw0)
     

다만 호러 게임의 경우 게이머가 직접 게임이 보여주는 폭력적인 이미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지점에서 영화를 비롯한 다른 매체들과 차이를 지닌다. 호러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앞의 관객이 자신의 취약성을 안전하게 노출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호러 게임의 플레이어는 자신의 취약성을 게임플레이에 내어주어야 한다. 호러라는 장르가 전제하는 이미지(혹은 텍스트)의 폭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곧 호러 게임의 플레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러 게임의 스트리밍을 본다는 것은 시청자가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했다면 내어주었어야 할 취약성을 스트리머에게 양도한다고 할 수 있다. 스트리머는 시청자들을 대리해 호러 게임을 플레이하고, 자신의 취약성을 게임 내부와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외부 양쪽에 내어준다. 물론 스트리머의 실력이나 담력 등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겠으나, 스피드런이나 공략 영상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전제는 유지된다. 훌륭한 실력으로 호러 게임을 돌파하건, 시청자를 대신해 비명을 지르건, 혹은 호러의 상황을 입담과 재치를 통해 코미디로 승화시키건 말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을 시청하는 것은 호러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호러 영화 속 주인공은 관객을 대신해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지만, 호러 게임 스트리머는 시청자를 대신하여 공포가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따라서 호러 게임 스트리밍이라는 장소는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메타-게이밍의 매직서클을 형성함과 동시에, 스트리머가 시청자의 취약성을 대리하는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게임은? 이때 호러 게임은 게이머에게 점프스케어와 음산한 분위기로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콘텐츠이자, 스트리머-시청자 관계에서 발생한 매직서클 안에 포섭된 대상으로 변화한다. 점프스케어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스트리머를 보던 시청자는, 스트리머가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호러 게임의 묘사에 익숙해지고, 나아가 호러 게임을 일종의 장난감에 가까운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 마치 호러 영화의 오래된 팬들이 슬래셔 영화 속 유혈낭자한 살인이나 고어영화 속 사지절단을 보며 환호하거나, 이러한 반응을 밀고 나가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스플래터를 비롯한 호러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취약성의 전제를 뒤집어야 한다. 호러 영화의 일반적 관객이 자신의 취약성을 노출시킴으로서 호러의 효과를 얻어낸다면, 호러 영화의 마니아는 자신이 앉아 있는 객석의 안전함을 무기 삼아 호러의 이미지를 즐긴다. 살인, 귀신, 악령, 크리처, 초자연적 현상, 그리고 공포에 휩싸인 등장인물은 공포의 매개가 아니라 유희, 나아가 조롱의 대상이 된다.


호러 게임 스트리밍의 시청자들은 호러 영화 마니아의 태도로 그것을 본다. 시청자들에게 게임 속 살인마나 크리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스트리머를 골탕 먹이는 존재이다. 시청자들은 어두운 지하실이나 숲속을 굳이 들어가는 호러 영화의 주인공을 바라보듯 스트리머를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호러 영화/게임의 관객/게이머에게 기대되는 것이 공포의 이미지라면, 호러 게임 스트리밍의 시청자가 기대하는 것은 리액션이다.


* [그림 4] 조르주 멜리에스 <악마의 집> 스틸컷

     

사실 이 리액션을 즐기는 것, 특히 무서운 것에 놀라는 타인의 리액션을 즐기는 것이 호러라는 장르를 즐기는 방법이 아닐까? 1896년 조르주 멜리에스가 <악마의 집>을 만들었을 때, 그것의 공포는 카메라 트릭을 통해 박쥐가 사람이 되고 해골이 움직이는 것에서 오는 놀라움이었다. 서커스의 프릭쇼(freak show)가 토드 브라우닝의 <프릭스>로 만들어질 때, 관객들은 ‘비정상’이라 여겨지던 존재들을 목격하고 서로 놀라워했다.


호러 게임의 스트리밍은 그러한 광경을 스트리밍 플랫폼 위에 되살린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스트리머는 리액션을 선보이고, 시청자들은 그것을 보며 즐거워한다. 스트리머의 리액션을 극단적으로 끌어내는 일련의 사운드 반응형 호러 게임들은 여전히 기초적인 호러 트릭을 통해 그 반응을 만들어낸다. 스트리머와 시청자들은 게임의 소재로서 등장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애정하는 호러의 소재들을 바라보며 놀라워하고 반가움을 표하며 즐거워한다. 호러를 즐긴다는 것은 공포를 제공하는 대상에 익숙해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화를 보든, 게임을 하든, 스트리밍을 시청하든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호러 게임 스트리밍을 보는 것은 차마 호러 게임을 플레이하지 못하는 ‘쫄보’들의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을, 스트리밍이라는 새로운 장소 위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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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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